규장각설치 역사 1776년 정조 창덕궁 왕실 도서관 설립 목적 총정리

규장각설치에 대해 알아보고 계신가요? 이 글에서는 규장각설치의 핵심 정보부터 실제 활용 방법까지 상세하게 정리했습니다.
끝까지 읽으시면 궁금증을 해결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규장각설치 배경 확인하기

규장각은 조선 후기 왕실 학문 연구 기관이자 도서관으로, 역대 임금의 시문과 저작을 보관하고 수집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규장(奎章)’이라는 명칭은 임금이 직접 쓴 글이나 시문을 가리키는 말로, 28수 별자리 중 문운을 주관한다고 여겨지던 규수(奎宿)에서 유래했습니다.

규장각 설치의 최초 구상은 1463년(세조 9년) 문신 양성지가 역대 군주의 글을 보관할 기관 설립을 건의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조 사후 곧 폐지되었고, 이후 1694년(숙종 20년) 세조가 친히 쓴 ‘규장각’ 액자를 종정시의 환장각에 봉안하려 했으나 군주의 권위를 절대화한다는 이유로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정조의 규장각 설립 목적 상세 더보기

1776년 11월 5일(정조 1년 음력 9월 25일) 정조가 즉위한 직후 창덕궁 금원의 북쪽에 규장각이 정식으로 설치되었습니다. 정조는 당시 왕권을 위협하던 외척과 환관의 음모와 횡포를 누르고자 했으며, 학문이 깊은 신하들을 모아 정치의 득실과 백성의 질고를 살피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조는 설립 취지에 대해 “승정원이나 홍문관은 근래 관료 선임법이 해이해져 종래의 타성을 조속히 지양할 수 없으니, 왕이 의도하는 혁신정치의 중추로서 규장각을 수건하였다”고 밝혔습니다. 규장각의 2대 명분으로 ‘우문지치(右文之治)’와 ‘작인지화(作人之化)’를 내세워 문화 정치와 인재 양성을 표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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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 조직과 관원 구성 확인하기

규장각의 관원 구성은 철저한 위계질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최고위직인 제학 2명을 필두로 직제학 2명, 실무 책임자인 직각 1명, 학술 담당관인 대교 1명을 두었으며, 도서 관리와 편찬을 전담하는 검서관 4명도 배치했습니다. 이들 규장각 관원들은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보다 더 중요한 청요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전체적으로 규장각에는 문관 총 6명, 잡직 총 35명, 이속 총 86명이 배치되어 운영되었습니다. 내각(궁궐 안)에는 국왕의 명령을 기록하는 사자관 8명과 각종 행정 실무를 보는 이속 70명을, 외각(궁궐 밖)에도 실무 관리 20여 명을 배치해 방대한 규모의 조직을 운영했습니다.

검서관 제도와 서얼 등용 보기

1779년 정조는 조선 건국 이래 처음으로 서얼 출신에게 검서관직을 개방하는 파격적인 인재 등용을 시도했습니다. 이를 통해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서이수 같은 실학자와 서얼 출신의 학자들이 규장각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박제가는 해외통상론과 북학론을 주장했고, 이덕무는 명말청초 반성적 경세가 고염무의 학풍에 심취해 있었으며, 유득공은 북방계 역사계승의식을 재평가하는 ‘발해고(渤海考)’를 저술하여 남북국시대론을 표방했습니다. 검서관 제도는 서얼 출신들의 학문을 양성하고 수용하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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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계문신 제도 운영 상세 더보기

정조 5년(1781년) 2월에 확립된 초계문신 제도는 규장각의 핵심 인재 양성 시스템이었습니다. 이 제도의 유래는 조선 초기의 사가독서제도나 독서당의 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초계문신은 과거를 거친 문신 중 가장 우수하다고 인정되어 승문원에 추천되었던 37세 이하의 당하관 이하 문신 중에서 선발하였고, 40세가 되면 해제되었습니다.

초계문신으로 선발되면 국왕의 도서관에서 재교육을 받으면서 국왕 측근에서 문화정책을 충실하게 보좌할 수 있도록 새로운 실력을 쌓아가는 인재로 양성되었습니다. 정조는 뽑힌 신하들을 직접 가르치고 매월 두 차례 시험을 보게 하여 평가했으며, 불시에 문제를 내어 맞히지 못하는 자는 부용지안의 작은 섬에 유배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초계문신 선발 기준 확인하기

초계문신의 선발은 의정대신이 주관하였으며, 그 목적은 사대부의 명절을 높이고 경학과 문학을 연마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선발된 문신들은 정조 시대의 문예 부흥을 주도하고 왕권 안정을 뒷받침하는 핵심 인력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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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 장서와 출판 활동 보기

1782년에 강화도의 외규장각(外奎章閣)이 완성되자 원래의 규장각을 내규장각(內奎章閣)으로 칭하고, 서적을 나누어 보관하도록 했습니다. 내규장각의 부설 장서각으로 서고(조선본 보관), 열고관(중국본 보관), 개유와(중국관 보관) 등을 세워 내외 도서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보관했습니다.

장서는 청나라에서 구입한 1만여 권의 고금도서집성을 포함하여 약 8만여 권에 달했습니다. 규장각은 출판 기능 강화를 위해 교서관을 속사로 삼고, 정유자(1777년), 한구자(1782년), 생생자(1792년), 정리자(1795년) 등 새로운 활자를 제작해 수천 권의 서적을 간행했습니다. 1781년에는 실학자 서호수가 중국 서적 3만여 권을 정리한 ‘규장총목’을 편찬하는 등 체계적인 도서 분류 작업도 수행했습니다.

주요 편찬 서적 목록 확인하기

규장각에서 편찬된 주요 서적으로는 정조의 어록인 ‘일득록’, 우리나라의 무예 서적을 집대성한 ‘무예도보통지’, 정확한 음운서인 ‘규장전운’, 정조가 직접 편찬한 음악서적 ‘시악화성’, 조선중화주의 입장에서 대명의리론을 정리한 ‘존주휘편’ 등이 있습니다. 또한 국초 이래의 중요한 관각문자를 모은 ‘문원보불’,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수정하여 합본한 ‘오륜행실도’, 이순신의 ‘이충무공전서’ 등도 편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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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규장각과 병인양요 상세 더보기

1782년 2월 정조가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외규장각은 전란에 대비한 안전한 도서 보관처였습니다. 그러나 1866년(고종 3년) 병인양요가 일어나면서 외규장각이 프랑스군에 의해 소실되고, 의궤를 비롯한 340여 권의 서적이 약탈되거나 불에 타버렸습니다.

약탈된 외규장각 의궤는 이후 1세기 가량 방치되어 있다가 파리국립도서관에 근무하던 박병선 박사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외규장각 의궤는 대부분 국왕의 열람을 위해 제작한 어람용이라는 점과 국내외에 한 점밖에 없는 유일본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어 연구자료로서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현재는 영구임대 형식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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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의 변천과 현재 확인하기

정조 사후 세도정치기가 시작되면서 규장각은 도서를 수장하고 관리하는 기관 정도로 그 역할이 축소되었고, 편찬되는 서적의 양과 질도 현저히 떨어졌습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궁내부 산하로 재편되었다가, 1895년 규장원으로 개칭, 1897년 대한제국 때 다시 규장각으로 개칭되었습니다.

1910년 경술국치로 규장각이 폐지된 후 소장 도서들은 조선총독부 참사관실 등에서 조사하고 정리하여 보관하다가 일부는 이왕가로, 나머지는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되었습니다. 해방 후 이왕가 도서들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으로, 경성제대 도서들은 서울대학교가 인수하여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규장각 도서를 보관하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시기 규장각 도서 보존 보기

1950년 12월 1.4 후퇴를 앞둔 급박한 시점에 규장각 도서 중 ‘조선왕조실록’, ‘비변사등록’, ‘일성록’, ‘승정원일기’ 등 후일 모두 국보로 지정된 전적 8,657책이 군용 트럭에 실려 전시 수도 부산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전란 중 이 도서들은 부산의 여러 창고를 전전하다가 1954년 6월 서울대학교 도서관으로 돌아왔으며, 다행히 서울에 남아 있던 도서들도 무사했습니다.

1989년에 규장각 전용 건물이 준공되어 1990년 개관식을 거행함으로써 규장각이 독자적으로 발전할 터전이 마련되었고, 1992년 서울대학교 부속기관 규장각으로 독립했습니다. 현재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은 귀중한 기록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연구하는 국학 연구기관으로서 그 역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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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설치 관련 자주 묻는 질문

규장각은 언제 누가 설치했나요?

규장각은 1776년 11월 5일(정조 1년 음력 9월 25일)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가 창덕궁 금원의 북쪽에 설치했습니다. 다만 최초 구상은 1463년 세조 때 양성지가 건의한 것이 시초입니다.

규장각 설치의 주요 목적은 무엇인가요?

규장각은 역대 왕의 글과 책을 보관하는 왕실 도서관 역할과 함께, 외척 및 환관의 횡포를 누르고 혁신정치의 중추 기관으로서 왕권 강화와 문화 정치를 추진하기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외규장각은 왜 만들어졌나요?

1782년 정조가 전란에 대비하여 왕실 관련 서적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설치했습니다. 그러나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소실되고 많은 도서가 약탈되었습니다.

현재 규장각 도서는 어디에 보관되어 있나요?

규장각 도서는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보관하고 있으며, 일부 왕실 도서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외규장각 의궤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입니다.

초계문신 제도란 무엇인가요?

1781년 확립된 초계문신 제도는 37세 이하의 우수한 젊은 문신들을 선발하여 규장각에서 재교육시키는 인재 양성 시스템으로, 정조가 직접 가르치고 시험을 보게 하여 개혁 정치의 핵심 인력으로 키웠습니다.